모노크롬 그림 '이상 열풍'에 휩싸인 화랑가

2014. 7. 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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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문화'랑'] '모노크롬' 의 귀환

한국 미술시장에 40여년 전의 유령이 떠돈다. 70년대 유신시대 한국 미술판을 지배했던, 화면을 백색 등 단색으로 온통 채운 모노크롬 그림이 새삼 각광받고 있다. 정치적 폭압기에 전통 '노장 사상'의 재해석을 내세웠던 묵은 미술사조가 왜 새 블루칩으로 떠올랐을까.

"불과 두달 사이에 분위기가 확 바뀌었어요."

요즘 서울 북촌 화랑가 사람들은 몸이 달아 있다. 불황기근에 찌든 한국 미술시장에 초여름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되는 까닭이다. 튀는 젊은 작가들이나 외국의 최신 미술 유행 대신 뒷방에 팽개쳤던 '영감님들 도 닦는 작품들'이 갑자기 시장으로 호출되고 있다. 형상이 사라지고 흰색, 회색 등의 단색으로만 화면을 온통 채웠던 그림. 박정희 정권의 폭압이 하늘을 찌르던 1970년대 유신시대의 미술판을 지배했던 단색조 그림, 이른바 모노크롬 회화다. 이 원로작가들의 묵은 작품들에 메이저 화랑과 컬렉터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메이저 화랑들이 잇따라 개인전과 기획전을 열거나 준비중이고, 화랑가의 쇼윈도 전시장도 모노크롬 작품들로 물갈이되고 있다. 한 메이저화랑 관계자는 "국외 컬렉터들도 관심이 많아, 올 하반기부터 시장 안팎에 회오리바람이 불 것"이라고 장담했다. 80년대 진보 작가들은 '위선적'이라고 냉소했고, 화랑가에서도 '돈 안 되는 그림'이라고 손사래 치던 모노크롬이 뒤늦게 대세로 뜨고 있는 배경은 뭘까.

원로작가들 묵은 작품에메이저화랑과 컬렉터들 눈독정상화 출품작 주문 밀려 매진다른 작가들 작품 가격도 급등입맛 바뀐 서구 미술계서 주목트렌드에 편승한 마케팅 성격담론 없이 거래만 과열되면'반짝 흐름'으로 끝날 수도

"이런 날 올 줄 몰랐다"

1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모노크롬 화풍 계열인 원로작가 정상화(82)씨와 재일 작고작가 곽인식의 개인전이 각각 개막한 뒤 미술품 딜러 ㄱ씨는 컬렉터들로부터 30통 이상 전화를 받았다. 질문은 대개 두가지. "대체 이 작품들이 왜 뜨는 거지요?" "사들여도 될까요?"

고령토 칠한 화폭을 뜯고 물감 메워놓기를 반복해 격자형의 평면을 만드는 것이 특징인 정상화씨는 프랑스와 일본에서 공부한 유학파. 1992년 귀국한 뒤 줄곧 모노크롬 작품만을 그려왔다. 2006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과 2010년 프랑스 파리 생테티엔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으나, 국내 시장은 반응이 별로 없었다. 이번엔 양상이 다르다. 출품작들은 전시 전부터 사실상 '솔드아웃'(매진) 상태다. 작품당 예약순번이 1~3번까지 겹칠 정도다. 그의 작품은 올해 초 경매시장에서 80호짜리가 유찰될 뻔하다가 2500만원에 겨우 팔리는 정도였다. 이번 전시에서 화랑 쪽은 100호 값을 1억원으로 매겼다. 80호는 8000만원대로 추산된다. 작가도 개막식에서 "평생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생각 못했다"고 감격스러워했다.

화폭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넣어 독특한 질감을 내는 하종현씨 등 다른 모노크롬 원로작가들도 값이 크게 뛰었다. 컬렉터 ㅇ씨는 "올해 초 지방에 매물로 나온 하종현씨의 100호짜리 대작을 1500만원대에 샀는데, 불과 서너달 만에 최소한 3배 이상 올랐고, 앞으로도 더욱 오를 것이란 풍문에 놀랐다"며 "일단 소장하며 시세를 저울질할 생각"이라고 했다.

지난달 열린 세계 최고 권위의 스위스 바젤아트페어에서는 모노크롬 작가들 작업이 한국 출품 화랑들의 부스를 메웠다. 한국 단색조 회화에 영향을 준 일본 모노파의 창시자 이우환 작가의 베르사유 전시가 열리면서 해외 컬렉터들의 주목도가 높아졌다.

국제갤러리는 한국의 단색화를 소개하는 팸플릿을 비치하고, 판촉에 열을 올려 이우환, 정상화, 하종현, 정창섭 작가의 작품들을 매진시켰다고 한다. 피케이엠 갤러리는 전혀 거래하지 않았던 윤형근 작가의 대작들을 들고나와 서구 유명 컬렉터에게 팔았다고 홍보했다. 작가 쟁탈전도 치열하다. 박경미 피케이엠 대표가 윤형근 작가의 유족과 전속계약을 맺어 작품들을 매집하면서, 윤 작가의 작품들을 구매·전시하려던 국제 쪽과 신경전을 벌였다는 뒷말이 흘러나왔다. 지난달 27일 중국 상하이에서는 기획자 정준모씨가 예술경영지원센터와 함께 한국의 모노크롬 미술을 집중 소개하는 기획전 '텅 빈 충만: 한국 현대미술의 물성과 정신성'(8월18일까지)을 차렸다.

결국 서구시장 입맛 때문에?

모노크롬 작품들이 주목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서구 미술계의 입맛이 바뀐 게 주된 요인으로 지목된다. 중남미·아프리카의 블랙아트나 중국의 정치적 팝아트에 주목하다가 식상감을 느낀 서구 미술관과 화랑들이 60~70년대 이우환의 모노파로 대표되는 일본의 담백한 전위미술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한국의 단색조 회화들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2011년 이우환의 초대전을 성황리에 열었고, 이듬해엔 뉴욕현대미술관 모마에서 도쿄 아방가르드란 제목으로 모노파를 조명했다. 지난해 베네치아비엔날레 당시 세계적 컬렉터인 프랑스의 패션브랜드 총수 피노가 개최한 '아르테 포베라와 모노파'전에도 이우환 작업들은 비중 있게 다뤄졌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갤러리가 지난해 마이애미 바젤 아트페어에서 하종현씨의 작품들을 출품하며 시장성을 타진해 쏠쏠한 수익을 거뒀고, 최근 아트바젤 홍콩과 바젤페어에도 잇따라 모노크롬 작품들을 출품해 매진 성과를 내자 국내도 모노크롬 대세론에 휩쓸리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 바람은 다분히 기형적인 모양새다. 유행을 뒷받침할 담론이 없고, 화랑들이 서구 트렌드에 편승해 기획한 마케팅 성격이기 때문이다. 이미 2000년대 초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의 '사유와 감성의 시대전', 한원미술관의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 등 모노크롬을 재조명하는 기획전이 있었다. 2012년에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전 '한국의 단색화'를 꾸렸으나 시장에 미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 최근 모노크롬 바람을 이끄는 국제갤러리나 피케이엠 갤러리 또한 모노크롬 작가들을 오랫동안 지원하며 사조의 흐름을 이끌어온 경험이 별로 없는 화랑들이다. 최윤석 서울옥션 이사는 "자생적인 한국 미술운동을 재조명한다는 의미가 크지만, 우리 미술계가 국제적 유행을 이끌 역량이 빈약하다는 것 또한 드러내는 현상이다. 담론과 의제 설정이 없다는 게 아쉽다"고 했다.

일단 팔고 보자? 쏠림 우려

화랑가의 풍경은 일변했다. 70년대 단색회화 작가들의 작품들이 화랑의 상설전 전시장에 대거 들어오면서 최근까지 주류였던 젊은 작가들의 팝아트나 극사실주의 작품들이 밀려나고 있다. 9월 열리는 국내 화랑들의 미술품 판매전람회 한국국제아트페어(키아프)도 모노크롬 잔치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국제갤러리는 2012년 '한국의 단색화'전을 기획했던 평론가 윤진섭씨에게 의뢰해 8~10월 '단색화 거장들'이라는 기획전을 광주비엔날레 개막에 맞춰 열 계획이어서 올가을 모노크롬 열기는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화랑가 사정을 아는 미술인들은 우려도 내놓는다. 모노크롬 그림에 대한 역사적 개념과 평가가 여전히 엇갈리는데다, 작품량도 극히 한정된 마당에, 상품 투자식 거래만 과열되면 반짝 흐름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기획자 정준모씨는 "단적으로 더이상 팔 것이 없어 무언가를 찾다가 나타난 현상"이라며 "70년대 작가들이 왜 전통을 현대미술 맥락에서 해석하려 했는지, 후대 화단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성찰과 탐구가 함께 풀려야 지속가능한 의미를 담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노크롬의 때늦은 재림이 한국 미술시장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을까.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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